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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정치!/음반

[박기영 Woman Being]박기영씨, 어떻게 여자가 되셨나요?



박기영 7집 - Woman Being
음반>가요
아티스트 : 박기영
출시 : 201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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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여자는 물론 모든 인간은 사랑으로 완전해진다.
추천해주고픈 사람 : 사랑 때문에 웃고, 울어 본 모든 여자들. 그런 여자를 사랑해 본 남자들.
추천곡:빛, Dear, Secret Love, 달
추천마ㅇㅇㅇ



"갈까요?"
남규리 씨가 나온 뮤직비디오도 좋지만 전 이 편이 나은 것 같습니다.
듣고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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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이야기


태초에 어둠이 있었으니,
여중-여고 테크트리를 타다.
자 중학교라, 썩 내키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중학생이 되려던 초등학교 6학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고 활기차다 못해 괄괄했던 성격 상 남자 아이들과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초딩이 인식할 수 있던 좁은 세계에서는 제3의 성이 있을리 만무하였으니 그렇다 치고, 남자와 여자, 이 두 가지 성별 중 하나의 성별과 완전히 단절된다는 것은 영 꺼림칙했나보다. 하지만 엄마는 ‘고등학교는 너 맘대로 가. 대신 중학교는 OO 여자 중학교로 가면 되잖아’ 하셨다. 엄마의 제안이 그럴 듯 했고, OO 여자 중학교는 집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아 반발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고등학교까지 여자 고등학교를 갔다. 그래서 6년간은 친구라고는 여자들밖에 없는 세상에서 남자들에 대한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형편 때문에 학원을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했고, 그렇다고 교회를 다녀서 소위 ‘교회오빠’로 대표되는 남자들과 마주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친구를 미친 듯이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만족스레 생활하며 오히려 여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약간의 페미니즘적 성향도 가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선택권은 나에게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여고를 간 것은 고교 비평준화인 우리 지역에서 여학생이 갈 수 있는 가장 명문고는 XXX 여자 고등학교였기에 그랬다. 엄마는 나한테 지능적인 거짓말을 하셨어! 애초부터 선택권이 없었던 거다.

항상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특성 상 누군가를 좋아하긴 해야겠는데. 그래서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남자애를 여중-여고 6년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면 주변에 그래도 남자는 있었으니 그것은 선생님들이다. 중학교 3학년때는 과학(물상)선생님을 좋아해서 성적 잘 받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당시 다소 소극적인 나에게 따로 부르셔서 '배짱'을 가지라고 충고하셨던 분인데. 카리스마 있는 수업과 인간적인 태도, 마른 몸매 등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문학 선생님의 시니컬하고 능글맞은, 솔직하면서 아픔을 간직한 특성에 매료됐다. 이 선생님한테는 졸업식 때 좋아한다고 쪽지를 드리기도 했다! 매년 선생님들을 뵈러 고등학교를 가는데 이 선생님은 갈 때마다 안 계시다. 최근 결혼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들의 특성을 상당히 닮고 싶어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닮아버리기도 했고.

하지만 선생님을 향한 사랑은 '가질 수 없는 사랑,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다. 하하하! 상호 교류가 핵심인 사랑에는 많이 못 미치는 방식이다. 왜, 영화도 있잖은가. 애정결핍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어릴 때부터 ‘인간의 목적은 종족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인 생각을 거리낌없이 말해오던 나였다. 정작 나는 이성에 대한 관심도 열망도 딱히 강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읽는 이들이여, 코웃음치지 마시라. 진짜다.) 6년간의 정규 교육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그 이름도 찬란한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니 기대감이 생겼다. 그거 아는가? 여고생들에게 대학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중 ‘미팅이나 소개팅이 많은가?’는 제1의 기준은 아니더라도 자주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판단 요소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우리는 진지했단 말이다. 뭐 아까도 계속 말했지만 필자는 거기에서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하는 입장이었음을 강조하고 싶은 바이다.(눈 딱 감고 믿어주세요.)

'남자'라는 종족과 친해지겠다는 나의 결의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수능 끝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대입 수험생들에게 연극을 무료로 보여주는 행사가 있어 신청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친한 친구 2명과 함께 봤다. 안 봐도 여성 동무들이다. 연극이 좀 뭐시깽이한게 <70분간의 연애>이다. 이름만 봐도 감이 잡히듯이 데이트 연극이란 말이다. 서로의 감정을 헷갈려하던 오랜 친구가 비로소 사랑을 깨닫고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개뿔 여고생들에게는 닭살돋는 염장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단 말이다! 그 연극 보기 전 대기실에는 추운 겨울을 서로의 체온으로 이겨내리라는 거국적 결단을 내린 듯 꼭 붙어 앉은 연인들 쌍쌍으로 가득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와중에, 기대평을 쪽지에 적어달라는 말에 이렇게 적을 수 밖에 없었다 : ‘사랑하는 친구들아, 이제 각자 대학에 들어가지만 우정 오래 간직하자. 그리고 다음 해엔 꼭 남자친구 끼고 오자. 이렇게 청승맞게 여자들끼리 오지 말고!’. 얼마나 불쌍했으면 연극 무대에서 배우 분이 읽어주셨다는 웃지못할 이야기.

"오직 너만을 생각한 밤이 있었어.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건지.
아무래도 니가 너무 좋아진게 아닐까?
이게 바로 사랑인가봐.
-박기영, <시작> 중.

2008년 1월, 여자들끼리 부대껴 연극을 본 세 여자들은 약 3년이 흐른 2010년 11월 현재, 사랑이 다가왔는가? 우리는 승리자들. 그렇다. 모두들 남자친구가 있다. 선머슴같이 놀던 친구들이 남자친구를 챙기는 걸 보면 정말 안 어울려. 물론 친구들은 나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 것 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2009년 겨울부터 첫사랑이 시작됐다. 그렇게 기대를 하고 들어온 대학이건만, 학부제도 속에서 전공이 없고 교양만 들으니 짜게 식어버린 공부에의 열정과 생각과는 다소 다른 대학생활은 내 열정도 앗아버렸나.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 신문사 생활에만 총력을 기울이면서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좋아했던 정도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 학교 신문사 안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나는 살짝 감정을 표현했다. 원래 사랑은 상대방이 아니라 사랑하는 본인을 위한 것이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Jason Mraz-이제는 내가 더 좋아한다-의 노래 외에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찾아 듣던 노래가 박기영의 <시작>이다. 조판을 끝내고 회식 겸 해서 신문사 사람들과 단체로 노래방에 갈 때면 그 아이 들으라고,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시작>을 부른 것은 단지 노래말이 시작하는 사랑을 찬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좋은생각>인가 <샘터>였던가. 여하간 박기영 언니의 글을 봤었다. 글에서는 그녀가 고등학교 때 축제나 학교 행사에서도 노래를 (잘) 불렀고, 자연히 그녀의 노래솜씨에 반해 '팬'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한 후배가 너무나도 그녀를 좋아한 나머지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문신을 하고 나타났다는, 그녀 자신조차도 깜짝 놀란 이야기도 적혀있었다. 어린 내게 다소 충격적인 얘기여서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얼마나 사람이 매력적이면… 그때부터 그 노래에는 뭔가 마법이 걸려있다고 믿은 것 같다. 부르는 가수의 매력이 녹아들어있는.



결과적으로 그 남자애와 나는 지금 서로의 첫사랑이 되어 서로에게 좋은 연인이자, 친구가 됐다. 어떻게 보면 박기영 언니의 노래에 우리 사랑의 공적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건 까맣게 잊은 채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언니가 책을 내셨다는 얘기, 플럭서스 들어가셨다는 이야기, 5월의 신부가 되셨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어도 말이다. 언니가 그동안 소속사 문제 때문에 힘드셔서 정규음반을 내지 않으신 탓도 있었다. <나비> 좋았는데. 그러다 4년만에 정규앨범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고, 마침!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위드블로그 캠페인에 박기영 언니의 음반이 있길래 냉큼 신청했다.



<신청문구>
2008년 플럭서스 겨울 콘서트를 두 개 갔다 온 이후로 개별 뮤지션을 넘어 플럭서스 전체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어요. 박기영 언니, 결혼한 이후엔 또 어떤 음악적 변화가 있을 지 기대되고요! 제가 좋아하는 W 오빠들도 앨범에 참여하셨으니 더욱 더 기대가 됩니당!


#2. 그녀와의 만남


그리하야 CD가 왔다. 플럭서스한테 CD를 직접 다 받아보다니 경사났다.



산뜻한 형광주황색이 마음에 든다. 박기영 언니는 더 예뻐진 것 같다. 원래도 실력파 뮤지션인데도 미모까지 빼어나서 주목을 받아왔다지.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것은 식상한 소리지만 사실이다. 식상한 소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4년만의 정규앨범! 비매표시가 딱 붙어있다.



CD도 흰색으로 깔끔하니-

뒷면

앞면




가사집 뒤편에는 이렇게 그녀의 여러 모습을 담은 화보가 실려있다.
흑백으로 분위기있는 여자의 모습을 아주 잘 구현해내고 있다 하하.
피아노 치는 모습이랄지, 상념에 잠긴 모습들이 마음에 들어서 따로 찍어놨당.


special thanks to 보이시는지.
"영원한 나의 빛이 되어준 둘리여보"
(둘리는 그녀의 남편 애칭이라고.... 부러우면 지는거다.)
어쩔 수 없는 새댁본능


#3. 그녀의 이야기


음반이 오자마자 음반을 오디오에 넣고 들었다. 나란 사람은 컴퓨터 할 때 스피커를 켜지 않고도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소리에 민감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전에는 꼭 음악을 듣고 싶어진다. 밤의 기운을 좋아하는데, 음악은 밤을 더 흥미롭게 하니까. 그리고 음반 이름이 좀 특이하잖은가. Woman Being이라니. 결혼 후 처음으로 들려주는 진짜 여자 이야기! 서로 바빠 오랫동안 못 본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녀의 얘기가 어서 듣고 싶었다.
"언니, 저는 이렇게 사랑하며 살았어요. 언니는 어땠어요?"

1번 트랙 - 안녕

"내 이름을 몰라"
우잉? 트랙 1번이 재생됐을 때 의아했다. 안개를 머금은 듯한 아스라한 목소리, 찬바람이 깃든 듯 어딘가 모르게 스산하고 서글픈 목소리. 분명 앨범 자켓사진 곳곳에는 사랑하는 자의 기쁨과 설렘이 엿보이더니, 여자가 됐다더니,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내 이름을 모른다냐. 금방이라도 깨어질듯한 민감함, 날카롭고 예민한 정서가 흐른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산산이 부수어지든 멀리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처음 들을 당시에는 이해 못했는데 계속 듣다보니 이 노래에서 말하는 그녀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뭐, 내 경험으로 치면 사랑에 관심없던 어린 시절이랄까? 사랑이 없기에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다. 사랑 없는 그녀는 완전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아니다.

2번 트랙- 꼭 한 번만
"어젯밤 꿈엔 그대와 내가 결혼했어요 놀랍죠"
나왔다! W&Whale의 도움. 배영준 선생님의 감성이 담뿍 담긴 곡이다. 몽환적인 멜로디와 꿈꾸듯 읊조리는 가사. 네가 닿지 않는 곳에서 너를 끊임없이 그리는 상태랄 수 있다.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 역설적으로 더욱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부르는 노래. 사랑에 대한 기대가 모락모락 피어날 때 인간의 정신활동은 가장 활발한 것 같다. 사랑에 대한 몽상, 상상력이 충만한 시기. 이 때 주의할 사항은 밤에 쓴 편지를 낮에 꺼내보면 본인도 민망하기 십상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은 이 때의 우리를 '오글거린다'고 말한다.


3번 트랙-빛
"바람이 스쳐 지나도 우는 난 너무 바보 같은 사람이 됐죠"
이 곡은 CD가 도착하기 전 유투브에서 들었던 곡이다. 꽃처럼 울었단다. 사랑의 행복함만 믿었고, 아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랑이 깨졌을 때,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아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배신감은 너무 슬퍼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 두려워한다. 어쩜 슬픔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이전에도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적이 있었다. 6집은 이별 후 아련하게 남은 감정이 녹아있다. 기사를 봤었는데, 6집 타이틀곡 <그대 때문에>의 가사는 결별한 당일 새벽 잠 못 이루고 10분 만에 완성했다고. 음악을 통해 영혼을 치유한다던 그녀. 아마 그녀의 음악이 치유력을 가지는 이유는 사랑을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4번 트랙-Dear
""
감정의 선이 살얼음처럼 얇디 얇게, 눈의 결정 모양처럼 섬세하고 또 미려하게 반짝인다. 거기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건 눈물 한 방울 반짝. 그래,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설혹 사랑이 우리는 배신한다 하더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랑 뒤에 오는 아픔이 아팠듯이, 아픔 뒤에 오는 사랑은 더욱 간절하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는 거다. 벅찬 감정이 마음에 닿지 않는가. 그녀의 목소리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곡이라 마음에 든다. 이 음반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생각함.

5번 트랙-One Love
"여기 그대와 나"
카멜레온같다. 그녀의 목소리에 슬픔이 어려있다는, 눈물이 맺혀있다는 말 취소해도 돼지? 이런 말 무엇하지만, 애교섞인 목소리가 달달한 밤에 더없이 듣기 좋다. 이 노래는 나의 사랑 단계에 해당되는 것 같다. 어른들은 20대 초반의 지금 내 첫사랑을 더러 '지금은 영원할 것 같지? 하지만 아니다. 너희는 친구야' 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난 그걸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고한 발언조차 어른들은 젊은날의 치기어린 호언장담이라고 할테지. 통계적으로 봐도 내 주장보다는 어른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냥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지. 잠언수행이랄까? 충격적인, 하지만 기분좋은 예외를 만들어가는 건 내 행운이다. 꼭 남들처럼 되리란 보장도, 그렇게 살란 법도 없다. 법이 있더라도 난 헌법소원 제기할거다. 능동적으로 바꿔나갈거다 이 말이다.

6번 트랙- secret love
"너의 시간을 멈춰"
비트가 좋다. 듣자마자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적인 목소리와 박자로 울지 않고도 이별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그녀만의 방법을 보여준다. 이 노래도 그녀의 노래 실력을 유감없이 뽐낼 수 있는 특화된 곡!!


7번 트랙- This Love
"혼자만의 시간이 갑자기 왜 필요하단건가요"
"또 혼자가 됐죠 또 혼자 울겠죠 또 혼자 지쳐서 또 나 혼자 잊겠죠"
W&Whale의 김상훈 아저씨꺼가 내 스타일이구나. 가시 돋힌 목소리. 이성적으로는 그만 두고 싶은데 마음은 말을 안 듣는 자기모순의 고통스러운 상황. 그리고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나를 버리고 떠나신 임의 외부적 모순. 고통스럽겠다. 다시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 같던 이별의 그림자는 냉정하게도 그녀를 또 혼자 남겨뒀다. "또"라는 수식어가 그녀의 성숙을 의미하는걸까, 아니면 깊이 박혀버린 절망의 가시를 의미하는걸까. 그녀, 바보다. 한 번만 꼭 안게 해달랜다. 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도 깨끗이 잊는다니, 현명하다.


8번 트랙- Flash Dance
"It's only for you"
또 혼자가 된 그녀, 춤을 추기 시작하다. 나에게 춤은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음악은 그녀에게 잡힐 듯 했다가 어느새 저 멀리 떠나있는 '사랑'이라는 놈의 장난과 희롱과 상관없이 항상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아픔을 잊고 은밀한 밤의 마법에 빠져드는 식의 노래를 좋아한다. W(Where The Story End)의 영향이 크다.


9번 트랙- 달
달은 여성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은 여성의 호르몬 주기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설명되었고, 달의 기운은 여자를 만든다. 흘러가는 구름과 뜨고 지는 태양에게 의지한들, 그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거 달은 더욱 잘 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감상했는데 후에 찾아보니 이 노래는 '아이티 지진과 파키스탄 대홍수 등 지구 건너편에서 자연재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한 거란다. 언니,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 진정한 세계시민으로 인정합니다.

10번 트랙- 가요
"나는 그대 안에 살 거예요"
여자, 다시 사랑을 말할 때. 그녀를 스치어 간 아픔은 열에 들뜨지 않고 다시금 휘감는 사랑을 조심스레, 가만가만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극적이거나 사랑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할 때 아낌없이 표현하고 사랑을 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11번 트랙- 나예요
나를 왜 바보로 만들었냐고 싫지 않은 투정도 부리지만, 글쎄. 내가 보기에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 자신의 마음에 귀기울일 줄 알고, 이것 저것 재는 것 없이, 어줍잖은 내숭 따위 없이 당당히 표현한다. 세상에 이런 천재가 다 있나! 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진정한 '나'일 수 있다.





12번 트랙- 어떻게 저를 알았나요
"그댄 내가 필요할 것 같아 그냥 여기... 여기 와있죠"
섹시해. 성숙하다. 그녀는 아마 이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최신의 현재의 날 것의 감정을 담지 않았을까. 사랑이라는 것이 잊혀지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회상을 거친 감정은 아무래도 현장감은 떨어진다. 요 노래는 direct. 신혼의 떨림이 고대로 전해진다고 하면 믿을까? 몇십년을 혼자 살아가던 그녀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실지로 느껴 얼마나 흥분될까.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만들어나가는 새롭운 경험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만 같은 흥미롭고 평화로운 협정이. 이건 어려운 말이나 대답이나 설명될 차원의 것은 아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손을 모으면 느껴지는, 그의 웃음에서 전해오는, 일종의 실험이다.

*
첫 번째 곡부터 12번째 곡까지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 본다. 하나의 이야기다. 그녀가 진정한 여자가 되어가는 이야기. 톡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던 여린 감성의 소녀에서, 그녀를 '어떻게 알'아줬는지 모르게 곁에 다가온 짝을 만나기까지. 한 여자가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까지 12권의 곡으로 이루어진 음반. 이 앨범에서 그녀는 짝사랑에 가슴졸여하기도, 상처를 주는 사랑에 아파하기도, 구원의 사랑에 감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금의 사랑을 얻기 위한 헛수고였다거나, 공염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녀를 더욱 완전한 여자로 거듭나게 한 중요한 순간들이었고, 지금의 사랑을 더욱 소중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다.

박기영 언니의 목소리는 듣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언니의 목소리는 화려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인지 전자음(일렉트로닉) (?)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꺄르르 웃거나 눈물이 또르르 떨어질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는 절제되거나 감각이 과잉된 일렉트로닉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거지. Dear식의 화려한 연주와 악기들과의 화합이 잘 어울린다고만 여긴거다. 그런데 이번 음반을 듣고는 생각이 바뀔 것 같다. 전자음도 감정을 담뿍 담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더불어 이 노래를 듣다 보면 내 사랑이 더욱 소중해진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면 여자든, 남자든 공감할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