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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멋대로 산다

집열쇠 없는 날=시간의 수렁에 빠지다


'집 열쇠 안 가져온 날'은 지금까지 살면서 참 많았다. 대학생이 되어 머리가 굵은 이후부터는 그런 일이 상당히 드물었으나, 예전에 의정부 처음 오게 된 금오동에서며 금오여중 주변 동네에서며 신곡동에서며 참 덜렁대는 성격 탓에 열쇠 안 가져 온 날이 많았다.

열쇠 안 가져 온 날은 시간의 수렁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구성원이 돌아오기까지, 짧게는 2시간 정도부터 길게는 5시간도 넘는 시간동안 내 모든 물건이 잠자고 있는 집 밖에서 무엇이든 할 일을 찾아야 하는 거다. 아, 기다리지 않는 예외도 있다. 몸이 작고 화장실이 계단 쪽으로 나 있는 단독주택을 살 땐 겁도 없이 화장실로 난 쬐끄만 문으로 통과해서 열곤 했었다. 어린아이들이란...ㅋㅋㅋ

그냥 많고 많은 하루 중에 평범한 하루일 때에는 집 밖 계단에 앉아서 닥치는 대로 전단지를 주워 읽는다. 돌맹이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흙을 흩뿌리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고 화분을 고르기도 한다. 정말 혼자 잘 노는 나로서는 심심치않게 잘 놀 수 있었다. 평소엔 그냥 지나치던 것들에 갑자기 무한한 관심을 기울이며 조용하게 시간을 보냈다. 계속 계단에 앉아 있는 내게 이웃이 말을 걸기도 했으며, 금오동 살 땐 주인집에 잠깐 가 있던 적도 있구나. 거 참. 친구네 갈 만도 한데 그런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었나? 아무튼 대개 동네를 하릴없이 돌거나 계단에 작은 종이 쪼가리에 엉덩이를 의지하곤 앉아 놀았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그렇게 버텼지만,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내게도 할 일이 많이 생겼다. 시험기간에는 공부도 해야 했고(특히 난 중학교 때 매일 공부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는 게 재미가 없었으며 세상에 대한 분노와 공명심으로 가득차 있던 때였다) 마냥 밖에 앉아 있기에 교복치마는 너무도 불편했다. 그래서 하루에 못해도 7천 원은 내야 하는 독서실을 그렇게 처음 가 본 날도 있었다. 열쇠 없는 날 공부할 거리도 없는데 독서실에서 누워 디비 자기나 했고, 또 종이쪼가리를 읽기도 했지. 시험기간엔 열쇠 아저씨를 불러서 문을 딴 적도 있다. 시험 끝난 날이었으므로 낮 12시 정도에 귀가했는데, 엄마의 평균 귀가 시간은 7시가 훌쩍 넘어버리므로 그 공백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열공쟁이였으니까! 열쇠 따는 데 만 원이었던 것 같은데. 수학여행 때 천 원 쓰고 돌아오는 내게 그때 치고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운동화도 잃어버리고, 열쇠도 안 가져오기 일쑤였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어서 그 빈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 같다. 지금 사는 용현동 아파트에서는 열쇠없어 기다린 기억이 일 년에 한 두번 뿐이다. 아파트에 처음으로 살게 된 건데, 신축한 따끈따끈한 아파트(관용적으로 이런 표현을 써 주지만 콘크리트는 절대 따뜻하지 않다. 뼈에 스미도록 차가울 뿐이지)였기 때문에 번호키를? 번호 열쇠를? 달 만도 하다만 왜 안 달았냐.(봐라. 이름도 모른다. 네이버 검색 결과 디지털도어락 정도의 명칭 되시겠다)

정말 왜 안달았냐는 말이다. 아직도 열쇠 안 가져와서 스물두살 먹어서(아직 어리긴 하다만 어엿한 성인이다!) 황망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어야 되나. 남친이 인사동에서 선물한 자개 열쇠고리를 단 열쇠라 소지하고 있는 것만도 정말 기분 좋은 물건인데, 사람인지라 앞서 말한대로 일 년에 두 번 정도 빼 먹는 거 같다. 2010년 들어서는 없었는데, 지난 10월 15일 오후에 발생했다. 사건 시각은 2010년 10월 15일 오후 5시쯤이던가.

영상아카데미 지상파 방송 촬영 때문에 자과캠까지 애써 가서 재미있는 경험을 하고 돌아온 때였다. 선배랑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고, 좋아하는 콩마을 밥도 먹은 터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알바까지 뺀 터라 오랜만에 일찍 귀가한 것이잖은가. 곧 있을 시험 준비 계획에 짱구를 굴리는 데, 문 앞에 서서야 열쇠가 없단 걸 알았다. 으레 하는 버릇대로 '설마', '너 안 나올거니?', '장난치는거지?'라며 혼잣말을 지껄이곤 정말 없단 것이 밝혀졌다. 엄마께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했는데 바쁘다고 안받아주시다가 집요한 전화 탓에 3시간 정도 후에 올테니 기다리라는 전갈을 받을 수 있었다.

흠, 이정도는 길지 않군. 실력발휘 좀 해 볼까?

과학도서관을 가고 싶었지만 에라이, 금요일은 휴관일이다. 평소에 좋아하는 홈플러스를 가기로 결정! 밥두 먹고, 책도 보고, 아이쇼핑도 할 겸.

배고픈 나는 작년 여름 메인헬스클럽에서 수영을 배우면서 먹었던 홈플러스 푸드코트의 산초랑 정식을 먹으러 갔다. 그 때 음식 조절을 조금 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푸드코트의 음식들은 대개 그럭저럭, 맛있지도 않고 맛없지도 않은 정도가 대부분인데 6천 원이라는 다소 비싼 가격 값을 했다. 그런데 지저스. 오랜만에 먹은 그 메뉴는 정말 최 악이었다. 짜게 식은 고등어며, 떡갈비였던 것이 싸구려 햄버거 패티로 둔갑해있는 한편, 너무 겨자를 많이 넣어서 시어빠진 콩나물 겨자 무침에, 최악이게도 질긴 낙지와 결합된 건 또 콩나물이었다. 생각이 있다면 한 식판에 똑같은 재료는 두 번 쓰지 않을텐데. 미역국은 또 어찌나 심심하던지. 역시 좋은 것은 추억으로 간직해야지 애써 또 찾으려고 하면 못 쓴다.

그렇게 실망한 이후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하고 1층 매장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두 시간이나 흘러 한 시간 남은 것이다. 내가 한창 관심을 가지는 주제가 있어서 그거에 관련된 책들을 엄청나게 찾아보며 스캔했다. 가벼운 주제라 여러 책들을 다 참조하면서 시간때우기 좋았다. 그리고 정말 다 봐서 볼 게 없을 때 평소에 보려고 찜해뒀던 어려운 교양 서적들도 둘러봐줬다.

인문학으로 광고한다는 그 아저씨 있지? 그 아저씨의 딸이 또 당당하게도 책을 냈더라. 다재다능하고 열정 많아 뵈는 어린 친구가 어찌나 재밌게 썰을 풀던지 딱 붙어서 봤다. 거기에 또 걔가 추천하는 도서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나온다. 자기네 아빠랑 손잡고 미술관 박물관 다니는 게 취미인데, 그것도 세계 각국으로(완전 부럽다) 미술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자기한테 아빠가 읽으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2달(?) 걸렸다는 걸 자기는 5주(?)에 독파했다는, 부모를 뛰어넘고자 하는 자식의 무의식다운 멘트를 날리면서.

이 책은 미술사스터디를 하면서 미술학과 학우가 추천한 거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놈의 실체를 보진 못했다. 똑똑한 애가 하루종일 붙잡고 씨름했을텐데 5주가 걸리다니, 네 놈의 실체를 맞닥뜨리리라!

검색대에서 검색을 통해 발견. 요기 홈플의 서점은, 그리고 특히 미술 서가 쪽은 도서 회전율이 빠르지 않다보니 옛날 책이 좀 많더라. 가운데에 떡 하니 두께를 뽐내는 서양미술사 보이는가. 디자인은 지금 바뀌었겠지.. 그래야 돼...



한 번 네 놈의 속살 좀 보자! 하고 책을 집어드는 순간 서가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넌 대체 뭐냐;;


뽑아드니 이상한 연걸 포트가 보였다. 특정 휴대전화에나 쓰일 것 같은 저 포트가 왜 하필이면 서양미술사 책 뒤에 숨어있었을까. 그리고 내게 빼꼼 고개 내밀었을까. 정말 의외의 발견에 재미있었다! 무지무지. 나 이런 거 좋아한다. 그리고 상상을 했다. 나중에 깜짝 선물을 주고 싶은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잘 안 찾는 책 뒤에 저런 걸 꼽아놓는 것이다. 그리곤 상대에게 전화를 한다. "야, 모모 서점 A-25 미술 서가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책을 한 번 봐. 꼭이다!"

김연수 씨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었을 때 도서관 모임에 가입한 주인공이 시를 읽다가(?) 어떤 글귀를 발견하곤 그 글귀에 적힌 미션을 수행했다가 아주 뜻밖의 발견을 한다. 정말 낭만적인 상상으로 가득찬 소설이었는데.


번외.
1. 집 열쇠 없는 아이가 된 근본적인 이유
현관문 개폐 시스템이 실물의 열쇠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것이지만,
엄마의 고된 로동으로 귀가 시간이 늦으시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쭈-욱
2. 대학 들어와서 집 열쇠 없는 아이가 잘 되지 않은 이유
머리가 컸다고, 성숙해서 그렇다고, 덜렁대지 않는다고 잠깐 생각할 뻔도 했으나
나의 귀가 시간이 상당히 늦어졌기 때문에
학보사 할 때에는 밤 12시~새벽 2시 사이로,
지금은 오후 7시 30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