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2012.04.23 10:46








하늘이 보내준 딸 (2012)

God's Own Child 
8.7
감독
비제이
출연
치얀 비크람, 사라 아준, 아누쉬카 쉐티, 나세르, 산다남
정보
드라마, 가족 | 인도 | 115 분 | 2012-04-19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보는 영화적 형식이나 문법은 '발명'된 것이다. 일단 기준점을 우리의 실제 삶에 놓고 봐도 그렇다. 영화처럼 결정적 순간은 있을지언정 그것은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칠 정도로 나를 쥐락펴락하는 삶의 다양한 결들이 모이고 모여 있다. 기-승-전-결, 서론-본론-결론,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과 같은 형식은 우리가 이야기를 맛있게 소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안한 결과이지 않을까. 특히 우리가 영화에서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개된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미국 할리우드식 이야기에 많이 빚지고 있는 것 같다. 이 떼 영화가 산업이 되면서 대량생산/분업과 같은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판에 박힌 듯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객석은 이 흐름에 별다른 저항 없이 길들여졌다. 실제로 이러한 할리우드식 이야기 구조는 소비하기도 쉽다. 고단한 현실에 눈 감고 실체가 모호한 희망, 영웅을 노래하니까. 뭐야, 이거 쓰고 보니 마치 '노예'같잖아!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의식적으로라도 인도영화를 자주 보자. 할리우드식 영화 문법의 본산지인 미국 영화나, 그의 아바타인양 철저히 복제를 수행하고 있는 한국 상업영화만 본다면 이걸 잘 모를 것 같다. 아니, 알고 있어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할 것 같다. 본인은 영화광은 못 되고 본 영화도 많지 않다. (앞으로 많이 보고 공부하겠습니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도 많이 안 봤다. 학교에서 영화 사조 수업을 들은 이후로 내가 당연하게 생각한 '영화'라는 것이 실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화의 일부, 즉 할리우드식 영화이며 그 기반이 얼마나 빈약한 지도 잘 알게 되었다. 특히 이 공산품 같은 영화가 정치를 비정치화하고 사람들을 현실의 문제에서 눈 멀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자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바르트 말마따나 1)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2) 그 의도대로 의미를 소비하는 사람, 그리고 3) 그 의미구조를 낱낱이 들추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할 때, 3)의 활동은 매우 미약했고 목소리가 작았다. 반면 1)과 2)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담론을 지배하고 있었다. 2)는 1)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3)도 못 되고 더 이상 2)도 아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도 답을 찾고 있다.



<하늘이 보내준 딸>은 분명 할리우드식 이야기 구조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 산만하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다섯 살 딸인 닐라를 빼앗긴 일'이다. 따라서 으레 이야기는 그녀를 찾는 것에 집중한다. 잔가지는 다 쳐내고 특정 사건, 특정 기간, 특정 인물의 이야기만을 담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 잘 가다가도 자꾸만 삼천포로 빠진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간략히 서술하면, ①닐라(딸) 빼앗긴 크리쉬나(아빠)가 변호사 아누를 만남 - ②크리쉬나와 닐라의 행복했던 생활(회상) - ③닐라의 납치 - ④크리쉬나와 아누 진영 대 장인과 바쉬암 진영의 법정 싸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②는 닐라의 탄생 전부터 시작하여 납치까지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어 늘어지는 느낌이다. 초반(①)에서 가질 수 있었던 긴장감과 인물에 대한 의문점을 무력화한다. 이 외에도 법정 싸움(④)에서 지나치게 작위적인(?) 이야기 요소가 사용되었다든지, 신선하면서도 약간은 촌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인도식 개그의 남발은 매끈한 미국식 영화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 관객에게 생경한 것이다. 또 갑자기 주인공의 춤과 노래로 뮤지컬 영화로 돌변하는 것 또한. 인물에 대해서도 의아함이 드는데, 신출내기 변호사 역을 맡은 '아누'의 역할 변신이 급작스럽다. 어릴 때 전형적 인물/입체적 인물에 대해 배웠는데, 그 개념을 갑자기 갖고 들어오자면 아누는 심하게 입체적인 인물이다. 극 초반에는 크리쉬나가 돈도 없고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내쫓았다가, 자기 때문에 많이 다친 크리쉬나에 대해 동정을 가지게 되고 딸을 찾기 위한 싸움의 선봉에 선다. 초반에는 극 중 재미를 주기 위한 캐릭터로 있는 듯 했다가 나중엔 웃음기 없는 여전사가 되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지는 와중에도 내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가 자문하게 되었다. 과연 잘 만들어진 영화의 기준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그 기준을 확립되는 데 어떤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은 없었을까? 구제불능의 회의주의자처럼 들리는데, 실제로 그런 줄도 모르겠지만, '당연한 것이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늘어진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어쩐지 기존의 관습에 사로잡혀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보는 건 아닐까 자책했다. 세상 영화가 다 할리우드식 이야기 구조를 가질 필요는 없는데. 그래서도 안 되고. 할리우드식 영화 제도를 한국에 도입하는데 1등인 기업이 쓰는 말이라 약간의 반감이 있는 용어지 다양성영화라는 말도 쓰던데(정확한 뜻은 모른다). 그리고 이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는 꽤 사랑스럽지 않은가! 이 영화 보기 전날 <이민자>를 봤는데 이것도 부성에 관한 영화라 <하늘이 보내준 딸>을 흥미롭게 보는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해서 영화가 보여주는 삶에서 신화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느 날, 커다랗게 떠오른 달을 보고 딸 이름을 '닐라(달)'로 지은 것부터 그렇고,(달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겁니다!) 크리쉬나가 부르는 노래 가사에 "대지가 물들고 (…) 신을 느낄 수 있네" 뭐 요런 가사가 나온 것도 그렇고. "닐 암스트롱도 이렇게 달에 집착하지 않을 거에요"라는 인도식 농담에서는 무릎을 쳤다(주위에 달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 있는데 써 먹어야지). 달님이나 어머니 대지, 신이 닐라를 보살피고 있음은 물론이고 닐라는 마을 공동의 차원에서 양육되고 사랑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배경적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봉착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 "지적장애자인 부모에게 양육권을 줄 것인가"  크리쉬나는 '딸을 자신처럼 순수하게 키운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다. 설혹 딸보다 지능 나이가 낮아질 지라도. 왜냐하면 닐라는 공동체 차원에서 키워지기 때문이다. <아이앰 샘>도 보지 않은 나이지만 이 지점에서 서구 개인주의가 배경일 그 영화가 이 영화가 다르지 않을까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봐야겠다..)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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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프카에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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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012.05.09 16:2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오,. 아직 위드블로그하네

    2013.01.06 22:17 [ ADDR : EDIT/ DEL : REPLY ]
  3. 난위드블로그 당첨안시켜줘 나삐졌오

    2013.01.06 22:1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