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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정치!/영화

<조용한 혼돈>에 <평범한 날들>을 비교하는 나는 잘못하고 있는걸까?








어이, 신사분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답이라도 나옵디까?



평범한 날들
감독 이난 (2010 / 한국)
출연 송새벽,한예리,이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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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였더라. 무슨 책에서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여하간 인간은 스트레스가 없으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스트레스 중독자들. 연애며 돈이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활동들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원한다. 분명 고통스럽고 짜증나지만 이게 우리네 일상이다. 아주 평범한 날들이다.

 우리는 헐리우드식의 과장으로 점철된 극적 장치에 길들여져 있다. 발단전개절정위기결말의 뚜렷한 위계를 지닌 그러한 서사는 우리에게 '모든 갈등은 해결된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끄읕-'이라는 원칙을 각인시켜준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삶이랴. 문학이 삶과 다른 점은 끝이 없다는 거라고 대단한 학자가 말씀하셨지(역시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걸 어째).

 진짜 삶을 반영한, 그래서 조금 지루한 영화를 우리는 종종 예술영화라고 부른다. 이것이 정말 삶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는 진짜배기 영화인지, 아니면 미숙함에 대한 변명인지 그 구분은 쉽지 않지만 어쨌든 꽤나 괜찮은 수식이다. 영화 <평범한 날들>은 배급사도 그렇고 영화의 주제의식이며 내용까지 예술영화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음...

 
조용한 혼돈
감독 안토넬로 그리말디 (2008 / 영국,이탈리아)
출연 난니 모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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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난 <평범한 날들>의 주제의식을 보다 '예술적으로' 먹음직스레 그려낸 영화 한 편을 알고 있었다. 바로 <조용한 혼돈>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그 두 영화를 양쪽에 두고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한 혼돈>은 내가 지금껏 최고의 감흥을 받은 역사학입문 수업 교수님의 추천에 의해 본 영화이다. 지금도 가끔 학교에서 마주치는 그 선생님은 라임색 컨버스 운동화나 티니위니 패딩, 페리 엘리스 티셔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아주 멋쟁이셨다. 나이는 꽤 많으신데 초동안이시고, 그가 내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박학다식함을 숨기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나를 일상사나 미시사 등의 포스트모던 흐름의 편린이라도 잡게 해 주셔서 잊을 수 없다. 그가 수업 시간에 추천해 준 영화로, 그 추천사를 듣자 마자 수업 끝나고 바로 저녁에 학교 근처 '하이퍼텍나다' 가서 '혼자' 봤다. '슬픔에 침잠하게 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추천해주셨었던 것 같다. 마침 난 그때 힘든 일이 있어서, 이런 행위로 위로를 받은 것이다.

 저 영화를 본 지 벌써 2년이 넘었나. 2009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봤으니까. 2년이 지난 후에 나는 이전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었고, 슬픔을 잊은 것처럼 위장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이 금방이라도 감정이 폭로될 듯한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그러던 도중에 <평범한 날들> 시사회 소식을 알게 되었고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보게 된 것이었다. 나는 우연처럼 다가온 이 영화가 또 <조용한 혼돈> 식의 위로를 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농담할 기분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평범한 날들을 그리고 있고 따라서 불편할 만큼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 있다. 의식적인, 꾸며낸 평범함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럴듯한 지루함과 생경함을 가지고 있지만 <조용한 혼돈>이 주었던 깊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성적인 코드와 일상의 폭력을 연결지으려고 한 것은 <평범한 날들>과 <조용한 혼돈>의 공통점이었는데, 후자에서 이것이 일종의 긴장을 해소했던 것과 달리 전자에서는 그 어떠한 효력도 미치지 못한 채 맴돌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