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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자/냠냠

성대국수, 밤에만 찾아오는 좁고 따스한 곳





성대국수 메뉴판. 종이에 가을을 닮은 소담스런 색으로 글씨를 쓰시곤 천과 두꺼운 실로 가장자리를 마무리하셨다. 이런 정취! 이 사진은 국수 사진보다 여기만의 아우라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성대국수_




 명륜동에 이리도 도도한 국수집이, 아니 음식점이 또 있을까? 수업이 파하고 정문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다보면 노오란 전등이 비닐 천막 새로 빛을 발하는 곳. 언제나 뿌연 김이 서려 있어 국수내음이 코가 아닌 머리에서 느껴지는 곳. 자리도 좁고 포장마차마냥 의자도 불편하지만, 카드 결제도 안 되지만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곳. 고로 성대 앞 자랑이라 할 수 있는 곳. 

 국수를 (정말) 잘 먹는 나지만 여기는 어제 간 게 두 번째다. 오후 4시부터 여니까, 다른 이들과 저녁을 먹을 때 여기서 먹을 기회가 안 난다. 술도 안 팔고, 많은 이들이 들어갈 수 있지 않으니 저녁 회식 자리로는 불편한 까닭이다. 혼자라도 먹으면 좋겠는데, 학교 앞에서 혼자 먹을 강심장은 못 되는 까닭이다. 남자친구와 처음 갔을 때에도 입학하고 2년 가까이 되었을 때였다. 장소에 영향을 많이 받는 건축학도 남친을 둔 덕에 나도 덩달아 장소성에 관심이 많다. 우리에게 이 곳은 국수처럼 담백하지만 주인 할머니 주름살처럼 깊게 인상을 팼다.

 이번 학기 수요일에는 수업이 9시에 끝난다. 같은 수업을 듣는 국문과 후배랑, 같은 시간에 경제학 수업이 끝나는 친구와 셋이 함께 허기를 달래고 피로를 풀곤 했다. 삼겹살이나 치맥과 같은 떠들썩한 메뉴로. 어제 친구는 시간이 안 나 후배랑만 집에 가게 됐는데, 원래 그냥 가기로 했다가 국수집 전등이 발갛게 빛나는 걸 본 거다. 짜게 식어버린 시험이 못내 아쉬워 뭐든 먹고 싶던 차였다. 

 오랜만에 간 국수집에 눈이 번쩍 뜨일만큼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바로 천막 옆에 나무로 짠 작은 공간이 생긴 것. 그렇다고 그 안에 쏙 숨어버린 건 아니다. 여전히 천막은 있고, 천막보다 두 배 넓은 공간은 잘도 숨어 있다. 모 교수님이 학생들 국수대접을 하는지 천막엔 자리가 없어 공간으로 들어갔다. 저마다 국수 한 그릇씩 들고 흥성대는 분위기다. 

 같이 간 후배는 내가 제일 애끼는 후배이다. 아주 인상적인 아이이다. 곧 중요한 자리를 맡을 후배와 신문사 얘기도 하고, 이것저것 농도 주고받는다. 갑작스러운 휴간으로 책도 세 권 씩이나 챙겨들었다. 1년 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신문사를 하면 이렇게 여유로운 모습은 흔치 않다.

 모 교수님의 학생들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후배 몫으로는 비빔국수, 나는 멸치국수, 그리고 각자의 그릇만 두기 아쉬워 매개물로 순대 하나를 시켰는데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옆 탁자의 두 사람은 우리보다 더 오래 기다리는 눈치다. 할머니의 여유로운 태도에 뭐라고 보챌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그려러니 한다. 프랜차이즈 식당에 갔으면 한참 전에 따졌을 거다. 장소가 사람을 바꾼다.

 한 그릇씩 턱, 턱 하고 국수가 나왔다. 멸치국수와 비빔국수는 독특한 맛이다. 여느 국수들과 다르다. 이게 진짜배기인 것 같다. 예전에 이게 더 흔했을 것 같아. 요새는 진짜보다는 진짜를 그럴듯하게 흉내낸 것들이 진짜가 되는 세상이다. 쫄깃한 면발에 뜨끈한 국물, 그리고 간이 짜지 않은 김치를 벗삼아 냠냠 먹었다. 김치를 잘 안 먹는데 여기 김치는 어머니가 직접 담그셨는지 사먹는 김치들과 다르다. 아, 참 여기 재료는 모두 국산이란다. 순대는 다른 데와 비슷하다. 다른 탁자를 보니 앙증맞은 천 원짜리 김밥도 보이고, 식감이 좋은 어묵 꼬치도 하나씩 들고 있다. 멸치국수, 비빔국수와 삼총사를 이루는 열무국수는 여름에 별미일 것 같다.

 국수집은 회전율이 빠르다. 그런데 여긴 조금 느리다. 그냥 국수만 먹는 게 아니라 장소성을 누리니까. 가격이 착한 덕에 다들 하나씩 하나씩 더 시켜 먹는 눈치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서 우리는 나왔다. 후배한테 계산하라고 건넨 만 원이 오 백원까지 남겨 다시 온다. 이렇게 적은 돈으로 푸근하게 저녁먹을 데가 또 있을까.

 후배는 여기서 처음 먹어봤단다. 요즘 나이가 조금 든 건지 후배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줄 때 아주 기분이 좋다. 인류는 이런 이치로 발전했을 지 모른다. 자기가 알고 있거나 느끼고 있는 것을 아래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인 것을? 다음에는 함께 하지 못한 친구도 데리고 또 가야겠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그 자리에 계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