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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정치!/영화

영화 <언터쳐블>, 대중문화와 고급예술의 화해로 읽다







언터처블 : 1%의 우정
감독 올리비에르 나카체,에릭 톨레다노 (2011 / 프랑스)
출연 프랑수아 클뤼제,오마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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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등에 업고 태동하게 됩니다. 그게 19세기 초. 물론 대중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이 '태동' 또한 달리 정의되겠지만 말입니다. 한 때 전공 수업으로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재미를 붙여 많은 책을 읽고 많이 생각했지요. 그런데 정작 제가, 그리고 대다수의 급우들이 얻은 결론은 대중문화, 문화를 정의내리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 생각하고 공부했던 내용들이 제 문화관, 미디어관을 넘어 세계관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으니 얻은 게 없다고 보기엔 많이 힘들죠.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관련하여 제가 가장 처음 읽었고 가장 열심히 읽었고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입니다. 지금도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전 아름다운 헌책방 대학로점에서 2500원에 중고로 샀기 때문에. 여하간 이 책은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중문화 연구의 '지도 그리기'를 돕는데 적합합니다. 대중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대중문화 연구의 역사, 그리고 다양한 쟁점들에 대해서까지 살짝씩 몸을 담글 수 있죠. 이 책을 읽은 지 꽤 되어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결국 문화는 정치라는 게 고갱이입니다. 또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적 힘을 두려워했던 지배계급이 고급문화라는 개념을 세워 예술을 어떻게 이분했는지도 참 인상깊었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대중문화는 천박하고 범속한 것, 그리고 고급예술분야(예를 들면 발레, 클래식 음악 등)는 고상하고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문화연구와문화이론(문화교양2)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존 스토리 (현실문화연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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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터쳐블>은 계급을 초월한 두 남자 간의 우정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결국은 예술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영화 광고 문구를 보면 '상위 1% 귀족남과 하위 1% 무일푼이 만났다. 2주간의 내기로 시작된 상상초월 특별한 동거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게 영화 컨셉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이 문구를 처음 보고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고이 접을 수 있었습니다. 물신주의가 극에 달한 이 세계에서 또 돈을 숭상하는 흔한 영화 중 하나구나. 라고 착각할 뻔 했지요. 이 문구에 거부감을 가지시는 저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그게 영화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영화 마케팅하는 거 치고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외화는 더 심한 것 같아요. 외국 문화의 특성을 배제한 채 오직 우리 시장과 우리 정서에 맞는 일부만 강조하여 곡해하는 것. 어쩜 공장처럼 대부분의 영화를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세계관으로 가르고 재단하는지... 여하간 덕분에 저는 이 영화를 전혀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고, 영화를 보고 난 현재에는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거 고마워해야 해요? 하하.












충무로 대한극장을 처음 갔습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극장이 아닌, 이런 지역 터줏대감 극장이 아직도 성성함을 감사했습니다. 엄마랑 보기로 했는데 피곤하시다며 절 차버렸습니다. 동국대 다니는 친구에게 급하게 연락해보았으나 수업 중이랍니다. 원래 혼자서도 잘 노니까 혼자 봤습니다. 위블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서 시사회 초대 이벤트를 많이 진행한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극장 안은 매우 혼잡했으며, 초대권 배부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화 시작 5분 전까지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서 있었습니다. 매우 비효율적인 광경이었습니다. 영화제를 꾸려가는 사람으로서 행사 운영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영화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이어서 영화 얘기.





"사람들이 왜 예술에 관심이 있을까? 다 자기 흔적을 남기려는 거야."



영화 <언터쳐블>이 프랑스 영화라는 것을 진작에 알았다면 이렇게 멋스럽다고 깜짝 놀라는 일 따위는 없었을텐데. 때깔 좋은 프랑스 영화답게 시작부터 배경 음악과 영상미로 압도합니다. 훔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랄까요. 밤을 질주하는 두 남자. 호기롭고 유쾌한 청년과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아저씨까지. 그들은 흑인과 백인입니다. 영화 처음 부분은 결론 부분과 맥이 닿습니다.


포스팅 초반에 제가 이 영화의 홍보 문구를 보고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씀드렸지요. '귀족남/무일푼'. 그리고 시각적으로도 선명한 백인/흑인의 대비. 영화 초반의 감각적인 영상에 그 감정은 어느 정도 누그러질 수 있었으나 그 이후에 나온 장면들로 인해 아직 누명을 벗기에는 일렀어요. 상류층 집안에 면접을 보러 온 흑인 청년. 몸이 불편한 백인 귀족남을 위한 '도우미' 면접에 참여한 것이지요. 다른 지원자들이 '장애우를 도와야 한다', '봉사 정신이 투철하여...' 등 성경에서 방금이라도 튀어나온 것만 같은 당위적이고 도덕적이어서 따분한 말들만 늘어놓을 때, 그 흑인 청년은 가식이라곤 전혀 없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도우미가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도 아니고, 그저 면접에서 떨어져서 지원금을 타먹으려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관객의 입장에서도 가식적으로 뻔한 소리나 해대는 다른 지원자들보다는 직설적으로 험한 말도 막 해대는, 그러나 오히려 묘하게 진정성 있는 그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결국 그는 도우미 자리를 얻게 됩니다.


영화의 의미는 무례하지만 유쾌하고 착한 흑인 청년과 점잖고 사려 깊지만 사지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많이 불편한 백인 신사가 우정을 쌓아가면서 생겨납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부자인 남자는 항상 그의 돈 아니면 장애를 신경 쓰는 인간들과의 사귐만 가져 왔지요. 그건 친척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흑인 청년은 백인 신사의 외부적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볼 뿐이지요. '날 보통 사람처럼 대한다니까. 연민이 없지'. 친척과의 대화에서 백인 신사는 흑인 청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흑인 청년은 조금 무례하거나 불친절한지는 몰라도 백인 신사를 사람으로 서게 합니다. 무조건적인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시대, 역시 친절은 미덕이라기엔 많이 미심쩍습니다.


청년과 신사의 사귐은 무르익어 갑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그들의 우정을 진전하는 매개체가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분법을 욕했음에도 계속 갖다 쓰는 게 자기 모순인 것 같기는 하지만 다시 소환해봅시다. 한 공간에 있기 힘든 귀족남/무일푼. 그들은 그만큼 삶도 다르고 향유하는 예술 또한 천지 차이입니다. 먼저 미술. 귀족남 필립은 화이트큐브 미술관을 돌며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이는 콜렉터입니다. 무일푼 흑인 청년이 보기에 코피 쏟은 것 같은 그림 하나가 몇 만 유로이고, 또 그걸 귀족남은 좋다며 단번에 사들이죠. 무일푼 드리스는 그 날 이후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이왕이면 코피 하나보다 다른 색도 많이 써서 추상화로. 그게 필립 보기에도 꽤 좋단 말이죠. 결국 필립은 친척에게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며, 베니스(베를린?) 전시까지 하고 있다며 1만 유로 넘는 가격에 팝니다. 이게 고급예술/대중문화 구분에 대한 전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의 그림(고급 예술)에 대한 드리스의 촌철살인의 한 마디는 통쾌함까지 가져다 줍니다. 뿐만 아니라 생전 제도권의 예술 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드리스가 흥에 겨워 그린 그림이 높게 평가받는 것이나, 유명 화가가 그렸다, 베니스 전시까지 했다, 하는 스토리 하나로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는 것이나, 현 예술 관념에 대한 조롱에 가깝죠. 미술이 문화가 아니라 산업인 것입니다. 미술계가 정치와 권력,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카르텔을 형성한 현 시점에 비추어 봤을 때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생각할 것이 꽤 많죠.


음악 분야로 넘어가면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필립은 생일날 연주자들을 불러 친척들과 음감회를 가질 정도로 클래식 음학 애호가이지요. 베를리오즈, 비발디, 바흐 등을 아냐고 드리스에게 질문하는 필립. 드리스는 어스윈드앤드파이어, 쿨앤더갱과 같은 음악은 잘 안다며 응수합니다. "춤을 추게 해야 음악이지!"라고 말하곤 어드윈드앤드파이어의 '부기 원더랜드'를 틀어 리듬에 몸을 맡기는 드리스의 모습에 모두들 유쾌해 하지요. 제 음악 취향이 드리스 쪽에 조금 더 가까워서 유쾌함을 부각하긴 했습니다만, 드리스가 좋아할 거라며 비발디 사계를 연주하게 하는 필립의 배려도 매우 멋졌습니다. 또 영화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어드윈드앤드파이어의 'September'에 맞춰 질주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또 즐기는 모습이 영화를 더욱 향기나게 했습니다. 필립의 클래식, 제도적으로 공인된 화이트큐브 미술관만이 예술이 아닌 것입니다. 드리스의 대중음악, 느끼는 대로 그리는 그의 그림 또한 훌륭한 예술인 것입니다. 그 둘을 구분짓는 기준은 누가 정한답니까?


요즘 영화제에서 일을 하며 영화 찍는 이들을 자연스레 많이 봅니다. 우리 단체가 작가들이 자율적으로 구성한 것이니만큼 더욱 더 그렇지요. 그래서 요즘 예술이며, 창작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언터쳐블>을 보게 되어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작가들이 창작을 하는 동기는 거대한 것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아주 추상적인 개념이든, 자기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근거 없는 단상이든, 또는 자기 역사에 관한 것이든. 모르긴 몰라도 <언터쳐블>의 감독 또한 자기가 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